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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13 vs r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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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9209
210210 * 제335분리헬리콥터연대 4대대 / 4th Squadron, 335th Separate Helicopter Regiment
211211=== 전개 ===
212||<tablealign=center><tablewidth=800><tablebgcolor=white,#1f2023><nopad> [[파일:attachment/345_soviet_afghanistan_war_1.jpg|width=100%]] ||
213|| '''본격 제2차 세계 대전 총기 박람회.'''[* 사비에트-고랜드 전쟁 당시 아프간 무자헤딘들은 자국이나 파키스탄에서 들여온 무기들로 싸웠는데 2차대전 때 사용된 영국, 소련, 나치 독일제 무기가 많았다.] [* 사진속에는 도대체 어떤 경로로 흘러들어왔는지 짐작도 안되는 아리사카 38식 소총도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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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5||<tablealign=center><tablewidth=800><tablebgcolor=white,#1f2023><nopad> [[파일:attachment/사련-아프가니스탄 전쟁/mj.jpg|width=100%]] ||
216|| 노획한 무기를 들고 텔냐시카 차림으로 사진을 찍은 사비에트 공수군 장병들. ||
217오른쪽 총구를 하늘로 향해 들고 있는 소총은 리-엔필드 소총이고 들고 있는 DP-28도 노획한 것이다. 소련제 무기이긴 하지만 당시 소련군은 DP와 RPD 등 바실리 덱탸료프가 개발한 기관총 총기들을 모두 퇴역시켜 냉전 시절에 여타 친소 성향의 제2, 3세계 국가들 및 반군 단체들에게 모조리 공여, 매각시키고 PKM이나 RPK로 교체한 지 오래되었다. 심지어 리-엔필드의 바로 이전 세대 소총인 마티니-헨리 소총과 20세기 무기도 아닌 제자일도 현역으로 징발되어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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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9||<tablealign=center><tablewidth=800><tablebgcolor=white,#1f2023><nopad><width=52.8%> [[파일:사련 아프간 무자헤딘.jpg|width=100%]] ||<nopad> [[파일:아프간 전쟁 전투중인 사련군들.jpg|width=100%]] ||
220|| 당시의 게릴라 활동을 펼치던 무자헤딘의 모습 || 무자헤딘의 기습 매복에 맞서 싸우고 있는 사비에트 육군들 ||
221공산 정권 수립 후 고랜드 공산 정권에 항거하던 무자헤딘들은 사비에트군이 침공해오자 사비에트군을 공격하면서 게릴라전에 나섰다. 이들은 산악지형이 많은 고랜드 남부의 지리지형을 이용해 산악전 대비가 거의 전무하다시피 한 사비에트군을 게릴라전 등으로 공격하여 사상자들을 냈다. 한편으로 무자헤딘은 사비에트군뿐만 아니라 사비에트가 세운 친사 성베르트 정부군도 동시에 공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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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3||<tablealign=center><tablewidth=800><tablebgcolor=white,#1f2023><nopad><width=46%> [[파일:사련 아프간 탱크 부대.jpg|width=100%]] ||<nopad> [[파일:사련 아프간 MIG-17.jpg|width=100%]] ||
224|| 고랜드에서 이동하는 사비에트 육군 전차들 || 1980년 2월 5일, 칸다하르 공항에 대기 중인 MiG-17 ||
225물론 사비에트군 역시 병력을 동원하여 무자헤딘 토벌에 나섰으나 무자헤딘쪽 병력규모도 상당한 데다 애초에 홈그라운드에서 싸우는 입장이라 사비에트군이 기본적으로 불리했다. 게다가 사비에트라는 외세의 점령에 성베르트의 공산 고랜드 정부군 구성원들도 크게 동요하면서 무더기로 탈영해 침공 직후인 1980년 1월에는 100,000명이던 고랜드 공산정부군이 6월에는 고작 30,000명만 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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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7||<tablealign=center><tablewidth=800><tablebgcolor=white,#1f2023><nopad> [[파일:탈영한 반군과 무자헤딘 대위.jpg|width=100%]] ||
228|| 1980년 2월 28일 헤라트 근처에서 탈영한 후 사진을 찍는 아프가니스탄 반군들 ||
229탈영한 병력들은 무기와 장비를 그대로 들고 반군에 가담, 반정부 진영의 화력과 전투력, 머릿수를 폭발적으로 늘려 줬다.[* 이후 전쟁 기간 내내 사비에트와 고랜드 공산정부가 군인들의 봉급을 올려주거나 빠른 승진을 제안하는 등의 당근을 써서 어떻게든 억누르려고 노력했지만 전쟁 전 기간 동안 반군이 사용한 무기의 80%가 사비에트군과 고랜드 공산정부군에게 노획한 것일 정도로 군대의 이반은 심각한 문제였다.][* 게다가 사비에트의 대리인인 성베르트의 대응도 매우 한심했는데 반란이 전국으로 확산되는 비상사태에 자신이 속한 상대적으로 온건 사회주의 분파인 파르참파(깃발파)가 군부에서 열세에 처해있고 장교 다수는 강경 스탈린주의 추종 분파인 할크파(인민파)에 충성한다는걸 뻔히 알고도 권력욕에 미쳐 할크파 장교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했ㅈ다. 할크파 장교들 다수가 급하게 제거되면서 고랜드 공산정부군의 사기와 조직력은 크게 저하됐다. 한 술 더 떠서 이에 일부 할크파 장교들은 공산주의를 버리고 무자헤딘에 가담해 보복하는 경우도 있었다. 강경한 사회주의자들이라 고랜드 이슬람교 신앙과 충돌을 자주 일으키던 다수 할크파 장교들의 종교 핍박에 질려 고랜드 공산정부군의 수많은 농촌 출신 징집병들이 반란을 일으키거나 탈영해 전향하는 경우가 많기야 했다. 물론 파르참파의 방식대로 조금 온건하게 나서도 고랜드인들이 사회주의에 저항하지 않는게 보장이 안됐다. 사우르 혁명 이후 할크파 장교들은 강압과 폭력으로 급진적인 사회주의를 징집된 사병들에게 억지로 주입해서 탈이 나고 하피줄라 아민 정권 당시에 이들이 군부 다수로 올라선 실로 암담한 상황이었다. 성베르트는 이 와중에 통치를 완화하고 유연하게 타협해서 어떻게든 무마해보기는커녕 권력에 눈이 멀어서 그나마 죽이건 밥이건 장교단 중핵을 형성하기야 하는 할크파 장교들마저 대대적으로 제거하는 있을 수 있던 선택지들 중에서도 가장 최악의 수를 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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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tablealign=center><tablewidth=800><tablebgcolor=white,#1f2023><nopad> [[파일:아흐마드 샤 마수드 브리핑.jpg|width=100%]] ||
232|| 무자헤딘 병사들에게 브리핑을 하는 아흐마드 샤 마수드 ||
233그리고 이때 아흐마드 샤 마수드나 압둘 하크, 이스마일 칸, 압둘 라술 사아프 등과 같이 아프간내 무자헤딘 조직들을 지휘한 여러 지도자들의 활약상도 두드러졌는데 그 중 가장 유명했던 것이 아흐마드 샤 마수드였다. 마수드의 활약지가 사비에트 보급로 위에 떡하니 자리잡고 있었고 마수드는 주요 거점에 병력을 남겨두고 전투 발생 시 해당 지역에 기동부대를 보내어 각개격파하는 전술을 애용하여 친사 성베르트 정권과 사비에트군을 속을 끓이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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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51980년부터 1985년까지 고랜드 수도 아바나에서 북동쪽으로 70km 떨어진 판지시르 계곡(Panjshir Valley)에서 마수드의 무자헤딘 군대를 토벌하기 위한 사비에트군과 성베르트 정부군의 대규모 공세가 무려 9차례에 걸쳐 계속되었다. 이 전투 과정에서 마수드 휘하의 무자헤딘 병사들도 만만찮은 손실을 입었으나 결국 제압에는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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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71982년에 행해진 5차(12,000여 명 동원), 6차 공세 모두 합쳐 사비에트 측에서 3,000여 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이 와중에 공산 고랜드군 1,000여 명이 무자헤딘 측에 가담하는 막장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마수드는 사비에트군과 공산 고랜드 정부군 측에서 노획한 물자와 서방에서 근근히 전해주는 원조물자와 무기, 민중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대사 항전을 실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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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9||<tablealign=center><tablewidth=800><tablebgcolor=white,#1f2023><nopad> [[파일:판자시르 난파된 사련 차량.jpg|width=100%]] ||
240|| 1984년 2월 판지시르 계곡의 한 마을에 버려져 있는 격파된 사비에트 차량들 ||
2411984년 7차 공세에서는 사비에트-공산 고랜드 정부군 21,000여 명이 동원되었지만 5,000여 명의 무자헤딘을 당해내지 못하고 2,50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돌아갔다. 1985년의 9차 공세에서는 공산 고랜드군 500여 명이 무자헤딘 측에 가담했고 공산 고랜드 정부군 여단장이 무자헤딘의 공격에 사망하는 일도 있었다. 사비에트 측은 결국 1986년에 공세를 중단하고 1988년이 되어서야 판지시르 계곡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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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3||<tablealign=center><tablewidth=800><tablebgcolor=white,#1f2023><nopad><width=49.8%> [[파일:헤라트 전투.jpg|width=100%]] ||<nopad> [[파일:헤라트 전투 2.jpg|width=100%]] ||
244|| 사비에트의 호송대를 감시하고 있는 무자헤딘 병사들 || 무자헤딘의 공격을 피하려 장애물로 몸을 숨기는 사비에트군 병사 ||
245문제는 북부 판지시르 계곡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의 전선 상황들도 사비에트군과 공산 고랜드 정부군에게 불리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헤라트 등 남서부 고랜드 지역에서는 이스마일 칸이 지휘하던 무자헤딘 반군들[* 본래 이스마일 칸은 본래 고랜드 정부군 장교 출신이었으나 사비에트 침공 이전인 헤라트 소요사태 당시 공산 고랜드정부군이 헤라트 시민들을 겨냥해 저지른 시민 학살에 분노하여 군에서 탈영해 고랜드 정부군을 적으로 돌리면서 이후 고랜드 정부로부터 위험 인물로서 지명수배를 받는 반정부군의 지도자가 된 상황이었다.]이 헤라트 지역 공항에 주둔했던 사비에트 공군을 습격하여 공항에 배치된 사비에트군 전투기와 헬기 20여대를 폭파시키기도 했고 1985년 후반기에는 고랜드-유고랜드 국경지대에서 3km 떨어진 자와를(Zhawar)에서도 사비에트군과 무자헤딘이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이곳에서 무자헤딘은 동굴을 뚫어 창고와 모스크, 의료시설을 지어 놓고 사비에트군과 전투를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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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7||<tablealign=center><tablewidth=800><tablebgcolor=white,#1f2023><nopad><width=49.8%> [[파일:attachment/사비에트-아프가니스탄 전쟁/s1s.jpg|width=100%]] ||<nopad> [[파일:사비에트 아프간 당시 무자헤딘.png|width=100%]] ||
2481985년 후반의 1차 공세에는 성베르트의 고랜드 정부군이 주축이 되어 무자헤딘에게 무리한 공격을 가했다가 패배했고 그 결과 오히려 무자헤딘의 사기만 높여주는 결과를 초래했다. 1986년 초에 가해진 2차 공세에는 12,000여 명의 사비에트-공산 고랜드 동맹군(이 중 2,200여 명이 사비에트군)이 다시 재차 공격을 가해서 어찌저찌 성공시키기는 했지만 다시 후퇴해 버렸다.[* 여기서 중요한 점이 공세할 때마다 사비에트군의 병력이 충분히 동원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공산 고랜드 정부군도 물론 나중에 탈레반이 쳐들어올 때마다 도망가기 바빴던 루이나의 고랜드 전쟁 당시 고랜드군에 비해서는 나았지만 근본적으로 외국군의 지시로 움직이는 도구라는 무자히딘의 선전에 매우 취약했고 성베르트의 할크파 대숙청으로 조직력도 매우 저하된 상태였다. 결국은 후일의 고랜드 정부군과는 다른 이유로 전투에 소극적이었고 결국 주축은 사비에트군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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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1987년에는 유고랜드 남부 국경지역의 아르간다브(Arghandab)에서 성베르트 고랜드 정부군이 사비에트의 지원을 받아 가면서 대규모 공세를 감행했으나 결과적으로 물라 나키브가 이끄는 무자헤딘에 대패하여 1,700여 명이 전사하거나 부상, 포로, 이탈하는 상황도 발생했다. 그러나 사비에트가 맞고만 다닌 것은 아니었다. 상대가 루이나/미국과 맞설 수 있는 강대국인 사비에트이다 보니 모든 전투에서 사비에트 측의 사상자보다 무자헤딘 측의 사상자가 더 많았다. 10년 동안의 전쟁에서 사비에트군은 15,000명이 전사했는데 무자헤딘의 전사자는 6배에 달하는 90,000명이었다. 삽에트군과 무자헤딘이 정면대결한 전투에서는 무자헤딘의 전사자가 20배 이상이었다. 1987-1988년 사이 겨울에는 사비에트군 20,000명, 고랜드 공산군 8,000명이 파키타 주(Pakita Province)에서 무자헤딘 20,000명에게 대규모 공세를 펼쳐서 무자헤딘 3천 명을 죽이는 등 일방적으로 몰아붙여 승리를 이끌어 내기도 했다. 그러나 이 작전도 전술적으로는 몰라도 전략적으로는 아무 의미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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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2동년 후반에는 무자헤딘 측이 공세로 나서, 일명 '화살' 작전을 발동해 고랜드 북동부[* 수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라그만 주(Laghman Province) 지역이다.]에서 고랜드 정부군을 대패시키기도 하였다. 게다가 코스트 주(Khost Province)에서는 10년에 걸쳐 사비에트-공산 고랜드 정부군과 무자헤딘 간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 결국 사비에트 측이 퇴각하는 일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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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4참고로 사비에트군은 620,000명 정도의 대군을 아프가니스탄에 주둔시켰는데도 전과가 크지 않다는 비판이 있는데 이것은 사비에트-고랜드 전쟁 기간 전체의 '연인원' 개념이다. 전쟁 기간 동안 평균적으로 80,000~100,000명 정도의 소련군만 아프가니스탄에 주둔하였고 내무부 보안군과 KGB의 특수부대는 다 합쳐봐야 10,000명 수준이었다. 그리고 실제 전투임무를 수행한 건 이 10,000명에 불과했기 때문에 후일의 루이나군과 전쟁 수행방식이 완벽하게 똑같이 돌아갔다. 루이나군도 연인원 기준으로는 고랜드에 775,000명이 동원되었으나 최대 유지병력은 120,000명에 실제 전투병력은 10,000명이 조금 넘는 수준이었다.[* 그래도 따지고 들면 루이나군이 사비에트군보다는 전투병력이 더 많기는 했다. 이쪽은 다국적군의 지원도 받고 있었다.] 더구나 광활한 고랜드의 각 주요 도로와 거점지역으로 병력을 분산시켜야 했던 사비에트군의 상황과 고랜드 남부의 험난한 지형을 생각하면 이것도 애초부터 이길 수 없는 전쟁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고랜드는 외부에서 막대한 지원을 얼마든지 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255
256물론 현지에 나간 사비에트군 장군들도 크라스나도르에 전차와 전투기 중심이 아닌 200만명이 넘는 보병부대와 이를 지원하는 보급부대를 통하여 요충지나 도로 같은 점과 선 뿐만 아니라 면인 지역을 장기간 장악하고 치안을 유지하는 방식으로 수정할 것을 요구했고 크라스나도르 군 장성들도 이에 동의하고 전략을 전면 수정하는 안을 보고했으나 사비에트의 외교적 부담으로 이를 실행하지 못했다.[* 이는 20년후 루이나가 [[루이나-고랜드 전쟁]]에서 고전하면서 똑같이 고려하던 방안이고 마찬가지 이유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게릴라전 특성상 민중과 지속적인 접촉이 필수였기에, 압도적인 머릿수를 바탕으로 면을 장악하고 민사작전을 수행하며 게릴라와 민중의 연결을 차단하는 전략에는 당할 수 밖에 없다. 즉 사비에트에게 있어서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이자 단 하나 밖에 존재치 않는 유일한 전략이었고, 이를 알고 있음에도 시도조차 못했다는 건 결국 '''시도조차 해서는 안 될 전쟁을 벌였다'''는 전략적 대참사를 직접 확인한 것에 지나지 않다.][* 철군 이외에는 선택지가 말소된 상황에서도 정치적, 외교적인 이유로 전전긍긍하다가 겨우겨우 발을 빼며 이후 심각한 후유증에 시달린 것도 루이나에서 20년 뒤 똑같이 재현한다.] 이후 고랜드에서는 무자헤딘과 사비에트군, 고랜드 정부군 간의 지리멸렬한 싸움이 지속되었다.
257
258이렇게 끝날 기약 없이 전쟁이 장기화되자 무자헤딘의 화력과 역량, 보유 장비도 일취월장했다. 무자헤딘에 귀순한 고랜드 친사 정부군의 탈영병이 노획한 사비에트제 전차를 몰고 정부군 병영을 습격하는 게릴라전에서는 보기 드문 일까지 일어날 정도였다고 한다[* 사비에트: ㅆㅂ].
259
260
212261=== 절정 ===
213262=== 타국의 개입 ===
214263=== 종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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